슬픈 올드보이와 더 슬픈 영보이
올드보이는 10년 전에 발표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이다.
일본의 원작만화를 영화로만든 것이다.
그런데 요즘 다시 ‘올드보이’란 단어가 세삼 화젯거리이다.
거기에 ‘슬픈’이란 수식어까지 붙었다.
건널목에서 뒷짐을 지고 먼 곳을 쳐다보는 50대의 힘없이 쓸쓸한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유명일간지의 일면 전체를 장식하고 ‘슬픈 올드보이’란 제목으로 주제 태마기사가 4면이나 실렸다. 지금의 50대를 한마디로 정의 내린 것이다.
회사에서는 퇴직나이는 되어 가는데도 자식들을 공부시키느라 에듀푸어가 되었고 집을 장만하려고 대출받아서 산 집값이 폭락하여 하우스푸어되어 경제적으로 노후준비가 안되었다.
그러다보니 아직도 직장에서 바쁘고 여유 없는 삶을 산다.
더불어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보니 아내나 자식으로부터 외면당한다.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한 사람들조차도 가정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그래서 모 케이블TV의 오인가족의 시트콤에서는 서열오위라는 이름표마저 붙어있다.
심지어 집에 강아지를 기르는 경우에는 서열이 강아지 다음이라는 농담까지 나온다.
또한 노인인구의 증가로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이 세대가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라고도 한다.
개발도상국 시대에 자신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하여 밤낮없이 힘들게 일만하고 살아온 세대인데 50이 넘은 나이인데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낙향하여 편안한 삶을 꿈꾸어보지만 현실 속에서 책임지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이런 것을 모두 함축한 의미가 결국 ‘슬픈 올드보이’이다.
그럼 치과계의 50대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생각해본다.
지금 50대 치과의사들이 처음 사회로 진출할 30대 때는 치과의사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더불어 경제적인 수입도 좋았다.
또한 환자들도 의사들의 말에 신뢰를 하였다.
치과의사들의 스트레스란 많은 환자를 보아서 체력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40대를 지나 50대를 오면서 경제적인 수입이 감소하였고 더불어 지출은 증가되었다.
환자들은 의사 말을 신뢰하지 않으며 까다로워졌다. 불법 네트워크 치과의사들의 횡포로 치과의사 간의 신뢰가 추락했다.
치과의사로써의 자긍심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까지 갔다.
호시절을 경험해보았기에 지금의 어려운 현실이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그것이 지금 치과계의 ‘슬픈 올드보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의 치과계의 ‘영보이’들이 생각난다.
지금 졸업하는 치과의사들은 대부분 치전원출신이기에 그들은 그 세대 속에서의 올드보이들 이다.
친구들보다 늦게 사회에 진출하였지만 현 치과계가 어려운 탓에 취직도 어렵고 개업은 더욱 어렵다.
구직 병원을 찾아보면 사회적 지탄을 받는 불법네트워크에서 많은 월급을 미끼로 유혹을 하고 외면하기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갈등을 한다.
학교에서 배운 임상내용만으로는 진료가 어려워서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도 많은 임상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더불어 여전히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다.
이들이 치과계의 ‘슬픈 영보이’ 들이다.
황폐해진 치과계가 올드보이나 영보이에게 어려운 현실을 주었다.
경제원칙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가격경쟁만을 행하면 결국에는 모두가 망한다고 한다.
따라서 고부가가치 산업은 불황속에서도 더욱 호황을 누리는 반면 싼 가격으로 할인하는 업종은 빈곤의 악순환을 거듭하다가 종국에는 망한다.
치과는 역사적으로 항상 고부가가치를 창조하였다.
초기 보철에서 포셀라인이라는 혁명을 내었으며, 다음으로 임플란트라는 혁명적 고부가가치를 만들어내었다.
그랬던 치과의사들이 불법 네트워크치과의 수가경쟁으로 고부가가치를 포기한 것은 너무도 어리석었다.
명품의 고부가가치를 포기한 어리석음이 자긍심도, 명예도 잃어버리게 하고 양질의 진료를 땡 처리 물건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치과계에는 슬픈 올드보이와 더 슬픈 영보이가 남았다.